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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세상에 없는 사람겨우 시집 한권 남기고 가버린서울을 떠나 해남에서 살다 먼길 떠나버린 시인세상에 있지 않은 이의 흔적을 더듬는 일은 묘한 감정이다 이렇듯 순한 언어의 시인이라 빨리 떠났을까? 물푸레나무 -김태정-물푸레나무는물에 담근 가지가그 물, 파르스름하게 물들인다고 해서물푸레나무라지요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들이는 건지그건 잘 모르겠지만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어스름어쩌면 물푸레나무는 저 푸른 어스름을닮았을지 몰라 나이 마흔이 다 되도록 부끄럽게도 아직 한번도 본 적 없는물푸레나무, 그 파르스름한 빛은 어디서 오는 건지물 속에서 물이 오른 물푸레나무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물푸레나무빛이 스며든 물그 파르스름한 빛깔이 보고 싶습니다그것은 어쩌면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빛깔일 것만 같고또 어쩌면이 세상에서 내가 갖지 못할 빛깔일 것만 같아어쩌면 나에겐아주 슬픈 빛깔일지도 모르겠지만가지가 물을 파르스름 물들이며 잔잔히물이 가지를 파르스름 물들이며 찬찬히가난한 연인들이서로에게 밥을 덜어주듯 다정히체하지 않게 등도 다독거려주면서묵언정진하듯 물빛에 스며든 물푸레나무그들의 사랑이 부럽습니다
순정한 서정성으로 삶의 상처를 애잔하게 노래해온 김태정 시인이 시집 물푸레나무를 생각하는 저녁 을 창비에서 간행했다. 1991년 사상문예운동 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 지 13년 만에 펴내는 첫 시집이다.

김태정 시인은 중심을 거부하고 주변부의 삶을 선택한 자의 고독과 슬픔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시인이다. 시인은 서울에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서울내기 같지 않은 (정우영) 삶을 살았다. 시인은 산그늘 허물어지는 정거장 에 내려 가풀막진 그림자 허방지방 올 라야 도착하는 「까치집」에 살면서 휘이청 기울어지는 한세상을 돌아 다시 어깨를 마주하는 낮은 지붕들 (「낯선 동행」) 아래에서 노래를 지었다. 이런 신산한 삶의 고통을 체험하면서도 시인은 자본주의와 물질세계로의 편입을 완강히 거부한다. 시인에게 가난은 궁핍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나의 조력자 가 되어 글을 쓰게 하 고 나를 살게 하 (「궁핍이 나로 하여」)는 힘이 돼준다. 이렇듯 중심(자본)에서 소외된 채 주변부의 일상을 견뎌내는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은 「해창물산 경자언니에게」 「사방연속꽃무늬」 같은 시들에서 아름답게 변주되고 있다.


제1부
호마이카상 / 슬픈 싼타 / 나의 아나키스트 / 시의 힘 욕의 힘 / 오늘밤 기차는 / 겨울산 / 울어라 기타줄 / 눈물의 배후 / 물푸레나무 / 최초의 성찬 / 미황사(美黃寺) / 월광(月光), 월광(月狂) / 가을 드들강 / 사방연속꽃무늬 / 부업 / 혀와 이 / 샤프로 쓰는 시

제2부
어란, 리미 / 달마의 뒤란 / 서정저수지 / 동백꽃 피는 해우소 / 별밭에서 헤매다 / 해남시외버스터미널 / 봄산 / 동백나무 그늘에 숨어 / 내유리 길목 / 하행선 / 멸치 / 배추 절이기 / 향기를 피워올리는 꽃은 쓰다 / 에움길

제3부
내 손바닥 위의 숲 / 군자란... / 까치집 / 낯선 동행 / 북한산 / 해창물산 경자언니에게 / 세상의 불빛 한점 / 거식증 / 물 속의 비늘 / 산 / 역마 / 봄날 저녁 / 궁핍이 나로 하여 / 배부른 아홉시에는

- 해설 : 정우영
- 시인의 말